역사썰~

[정유재란]명량해전 위치-임하도(林下島)이다.(reupload)

사랑의열매를주는나무 2022. 5. 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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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글은 제가 여러 자료를 훑어가면서 도출한 결과이오니 학자님들과 의견 차이가 있는 부분은 양해 부탁드립니다.(학자 아님!!) 충남 아산시민입니다.  글을 작성하기 위해서 진도까지 내려가서 현장 답사를 했습니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달아날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 마장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난중일기 초고. 속(續) 정유년(1597년) 9월 16일"

 

윗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 마장(800m-1km)뒤로 물러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벽파진에서 명량해전의 "주전투"가 있었다는 주장에 따라서 지도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난중일기에는 "우수사 김억추는 물러나 묘연한 곳(아득히 먼 곳)"에 있다고 하였으니 1km는 넘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맑은 날에는 사람의 가시권은 10km가 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충무공전서 2권에는 2마장 밖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므로 그 이상이라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김억추"의 판옥선이 2마장 정도 물러났다면 그 뒤로 더 물러날 공간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벽파진에 대입을 하면 울돌목 앞에는 "녹도"가 있습니다. 여기는 대규모 전투를 치르기 어려운 지형입니다. 밀물일 때는 울돌목에 조류로 인해 작전을 못하니 벽파진 해역에서 작전을 해야 하는데 벽파진 해역을 보면 조그마한 섬(암초) 등이 있어서 판옥선이 작전을 하기엔 무리가 많은 여건입니다. 벽파진쪽 해역은 명량을 등지고 있기에 사료에도 맞지 않고 13척의 판옥선으로 왜선을 물리치기엔 지형적으로 버겁지 않나 싶습니다.

<벽파진 해전:1597년 음력 9월 7일 야간전>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에는 벽파진 해전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공은 다만 창잔(瘡殘)의 남은 군졸로 13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의지할 곳이 없어 벽파정(碧波亭) 앞바다에 머뭇거리고 있었으므로, 보는 이들이 위태롭게 여기었다. 공이 하루는 갑자기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려 이르기를,

“오늘 밤에 적이 반드시 우리를 습격할 것이니, 여러 장수들은 각각 군대를 정돈하고 경계를 엄중히 해야 한다.”하였다. 그런데 이날 밤에 적이 과연 군대를 비밀리에 출동하여 쳐들어왔다. 그러자 공이 스스로 일어나 큰 소리로 호통을 쳐서 제군(諸軍)들로 하여금 동요하지 말고 각각 닻을 내리고 기다리게 하여 더욱 강력히 싸움을 독책하니, 적이 포위망을 풀고 가므로 공은 회군(回軍)하여 우수영(右水營)의 명량(鳴梁) 앞바다로 와서 있었다.

통제사 이공의 유사에는 "벽파정 앞바다"와 "우수영의 명량 앞바다"를 분리하고 있는데 벽파진 전투에서 닻을 내리고 기다리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물살로 인해 특별한 작전을 했을법합니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먼바다에 물러가 있고,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려 하니 적들이 물러간 것을 틈타 더 대어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물러가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 난중일기 초고. 속(續) 정유년(1597년) 9월 16일 -"

"판옥선이 먼바다로 물러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벽파진 해역은 "녹도"가 있고 "울돌목"이 있어서 먼바다로 갔다는 표현은 지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또한 "우수영"은 울돌목(진도대교) 아래입니다. 윗 사진에서 벽파진 상류에서 전투가 벌어지려면 진을 "우수영"이 아닌 "벽파진"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울돌목(진도대교)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울돌목은 빠른 물살로 인해 육박전이 불가하고 배를 돌려서 포를 조준하기 어렵습니다. 영화 명량처럼 닻을 놓고 수평으로 배를 돌려서 포를 쏘는 것은 거의 힘듭니다. 게다가 피난선이 후방에 있다면 피난선 보호에도 이득이 없는 지리적 조건입니다.

또한 왜군은 "도선"을 하려 시도했을 겁니다. 도선을 하려면 배를 판옥선 옆으로 붙여야 하는데 빠른 유속에서는 어렵습니다. 물론 물살의 유속이 느린 시점에서는 가능하겠으나 그 외의 시간은 어렵습니다.

무동력선은 물살에 맡겨서 전진을 해야 하니 여기서 접전이 있었다면 통제사 혼자서 130척 이상의 왜선을 받아내야 합니다. 난중일기를 보건대 무언가 가로막고 있었기에 130척의 왜선이 통제사의 뒤편으로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통제사가 초능력의 힘으로 이곳을 틀어막는다면 모든 전선이 이곳에서 닻을 내리고서 길목을 차단할 것이기에 해상에서 자유로이 기동 하면서 왜군을 공격할 전함이 없어지게 되고 있다 하더라도 울돌목은 막혔기에 조선 수군은 공격대를 따로 편성해서 진도 섬을 돌아서 공격을 해야 합니다. 엄청나게 비효율적입니다.

또한 난중일기에는 적선이 명량을 거쳐서 조선 수군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명량"을 거친다는 말은 왜군은 아무런 제지 없이"울돌목(진도대교)"을 통과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울돌목(진도대교)은 해전 장소가 아니게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울돌목만 고집하는 이유는 "이 충무공 전서"의"좁은 목"때문입니다.

또한 울돌목에서는 무동력선(목선)은 전투를 할 수가 없는데 밀물과 썰물 타임에 물살이 빠르고 거칠기에 왜군뿐만 아니라 조선군도 물살에 빨려 들어가서 울돌목을 벗어나게 됩니다. 왜선들만 전열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조선 수군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남 주민이 말하길 울돌목을 통과하는 배들이 엔진의 힘으로 가도 조류를 넘지 못해서 낑낑거리면서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울돌목(진도대교)에서 싸우면 명량을 등지고서 싸우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충무공전서에는 왜군은 두 패로 갈라서 번갈아 가면서 조선수군을 공격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울돌목은 최소폭이 280m이고 오전부터 100여 척의 왜선이 두 패로 갈라져서 공격할수 있는 지형이 아닙니다. 두패로 공격을 하려면 전진/후진/선회를 해야 하므로 물살이 울돌목(진도대교) 보다 약하다는 조건이 붙어야 하고 해전 장소의 폭이 최소 1km는 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래의 사진은 이충무공전서입니다. 상하권.. 두 권을 구입했는데 책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상은 이은상 님의 번역본을 하권은 충무회 발행권입니다.

조선수군이 판옥선으로 울돌목을 틀어막는다면 판옥선은 최소 20척 이상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우수영 골목길"입니다.

많은 분들이 여기가 "명량 전투가 벌어진 해상이라고 말합니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달아날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2 마장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적의 무리가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했다."

-난중일기-

보시면 이순신 장군은 우수사 김억추가 2마장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뒤로"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양도"와 "학동리"사이에서 전투가 시작된다면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 위치는 "저기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도"에 가려지기에 "김억추의 판옥선"을 보려면 저 지점까지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양도"와 "학동리"사이의 수로를 벗어납니다. 이순신 대장선 후방에 있다면 "김억추"판옥선은 우수영 육지로 올라가게 됩니다.

또한 이순신의 대장선이 돌진을 했습니다. 조금만 돌격하면 바로 울돌목의 급류이죠. 게다가 적들도 저항하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한다는 것은 저 지점에서는 어렵습니다.

조선 수군에게는 불리한 곳이고 기동을 하다가 판옥선끼리 충돌하기 쉽습니다. 양도-학동리의 수로는 대략 폭이 600m 정도 되는데 130여 척의 왜선이 조선수군을 에워 쌓을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은 아닙니다. 

견내량을 생각하면 됩니다. 임진왜란 때 한산도에서 이순신 함대가 학익진 전법으로 와키자카의 수군을 대패시켰는데 견내량에는 6척의 판옥선이 들어갔습니다. 견내량은 전라우수영 앞 수로보다 넓었음에도 좁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또한 울돌목 아래는 길이 열려 있기에 왜 수군의 수송부대가 서해로 진출을 할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양도-우수영 수로는 "좁은 목"도 아니며, "울돌목으로 들어가는 목"도 아니며, "길목"도 아닙니다. 우수영 항구로 들어가는 것을 제외하고 필수로 들어가야 할 코스는 아닙니다. 따라서 양도-학동리에서는 전투가 발생할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제가 추천하는 명량해전 장소는 "임하도"입니다.

임하도를 추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故移陣于右水營前洋: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난중일기 1597년 음력 9월 15일:국보 제76호)

[前(앞 전), 洋(바다 양)]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고 했습니다. 우수영(육지)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우수영 앞바다(해상)로 수군진을 옮긴 것입니다..

따라서 "섬"으로 옮긴 것입니다.. 섬으로 수군진을 옮기게 되면 육지에서 올라오는 적을 손쉽게 방어할 수 있습니다.

또한 통제사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다 하여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긴 것인데 이것은 명량해협을 바라보고서 싸우겠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한 사내가 길목을 막으면 족히 천명의 사내가 두려워한다' (일부당경 족구 천부)((一夫當逕( 足懼千夫))

1597년 통제사 이충무공이 수군을 거느리고 진도 벽파진 아래에 주둔하고 있다가 "울돌목으로 들어가는 목(명량 입구가( 되는 목)"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해남명량대첩비>

-해남 명량대첩비에는"울돌목으로 들어가는 목"에서 통제사 이순신이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고 기록하였는데 서해에서 울돌목으로 진입하려면 거쳐야 하는"목"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이 "임하도의 목"입니다. 또한 이 해전이 "명량대첩"입니다.-

명량(鳴梁)의 입구여 좁고도 단단하니/ 조수가 밀려오면 양쪽의 땅이 잠길 듯하구나/ 지리를 잘 이용하여 기이한 계략을 내었으니/ 새까맣게 몰려들던 추한 무리 버틸 수가 없었네. (해남명량대첩비문)

​해남 명량대첩비의 명량의 입구를 지도를 놓고 살펴보면 임하도의 좁은 목은실질적으로 명량해협의 "입구"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임하도의 좁은 목을 통과하면 바로 명량해협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 나아가, 적군이 이르자 적군의 망루(望樓)와 노(櫓)가 바다를 덮는 듯하였다.. 공은 여러 장군들에게 명령하여 배를 몰아 좁은 목에 대기시키고, 뱃머리를 나란히 하여 닻을 내리고 중류(中流)를 막고 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명량은 육지 사이가 좁은 데다가 때마침 밀물이 세차게 몰려와 파도가 매우 급했다. 적은 상류로부터 조수를 타고 몰려 내려오는데 그 세력이 마치 산이 내려 누르는 듯하였다......(이충무공전서)

이것으로 명량해협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군은 큰 배와 많은 군대로 바다에 가득히 몰려왔다. 공은 여러 장군에게 명령하여 배를 명량으로 들어와서 좁은 목에 대기시키고 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곳은 좁은 데다가 때마침 세차게 몰려오는 밀물의 파도가 매우 급했다. 적은 상류를 이용하여 산에 내려 누르는 듯이 아군을 향하여 몰려들었다.(해남명량대첩비)

"닻을 내리고 중류를 막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을 가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목을 막은 것입니다. "임하도"를 포구로 만들고 왜선을 밀어붙여서 섬멸을 하려 했던것 같습니다. 그러면 수로를 통과하려던 왜선들은 이른바 철쇠에 걸린 것처럼 막혔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여러 장수에게 명령"이라고 했으니 13척의 판옥선 장수중에서 쪼개서 작전 지시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병력을 두 패로 쪼개서 서로 다른 임무를 준 것입니다.

조선수군도 해전 발생 하루 전부터 부하들에게 목숨을 다해서 "길목"을 막을 것을 주문을 한 것으로 봐서는 임하도의 좁은 목을 항로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혹은 첩보로 이곳을 통과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거나요.

그동안 많은 분들이 난중일기에 기록되지 않은 장수들은 도대체 뭘 했을까? 하는 고민에 빠졌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13척의 판옥선이 함께 기동을 했다고 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지금까지 계속 조선 수군의 해전 상황이 미궁에 빠졌던 것입니다.

해남 명량대첩비를 읽어보면 "배를 명량으로 들어와서 좁은 목에 대기시키고"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그러니깐 명량해협 바깥 해역에 판옥선이 있다가 적이 오니깐 임하도의 좁은 목으로 수척의 배를 보내서 닻을 내리고 막게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울돌목에서는 이런 조건이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판옥선을 쪼개서]] 각기 다른 임무를 주었기에 울돌목에서는 부합하지 않은 전개입니다. 울돌목이 해전 장소가 맞는다면 난중일기에 기록되지 않은 장수들은 닻을 내리고 울돌목을 막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13척이 아니라 6척+초 탐선(민간선박)이 울돌목에서 대기를 해야 하는 겁니다.(선조실록에 배흥립은 통제사 쪽으로)) 그리고 기존 입장대로 13척이 울돌목을 막고 기다리고 있었다면 일본 수군을 공격을 할 판옥선이 없어지게 됩니다. 조선 수군의 모든 전선이 울돌목(진도대교)에서 닻을 내리고서 꼼짝도 안 하고 틀어막는 것이 됩니다.

(난중일기 1597년 음력 9월 16일 자) 통제사는 수군진(항구)에서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아가니 적선 133척이 바로 에워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통제사의 대장선과 판옥선은 좁은 목을 막지 않았고 노를 열심히 저어서 바다로 나아가서 바로 해상 전투를 한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 수군은 병력을 분리해서 서로 다른 임무를 한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를 대입하면 통제사는 적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수군진(항구)에서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아가서 울돌목에서 다시 닻을 내리고 133척의 적이 에워 쌓을 때까지 기다린다? 이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한 "적들이 명량을 거쳐서 우리 배를 향해 바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울돌목(진도대교)에서 닻을 내리고 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조선 수군을 프리 패스한 것이 됩니다.

또한 "좁은 목"과"명량"을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좁은 목"이"해남과 진도 사이(진도대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울지 않는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 적의 배들이 바다를 덮어 오는지라 공은 여러 장수들에게 나아가기를 재촉하여 좁은 목에다가 뱃머리를 잇대어 닻을 내리고 바다 중간을 끊어 적들을 기다리었다. 명량은 목이 좁은 데다가 조수는 마침 들어와 물결이 더욱 빠른데 적군들이 상류 쪽으로부터 조수를 따라 덮쳐오니 형세는 마치 산이 누르는 것 같아 우리 군사들은 풀이 죽으므로.....◀<이충무공전서>

이 충무공 전서에서는 뱃머리를 잇대고 기다리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깐 판옥선과 판옥선 사이에 간격이 없이 이어서 좁은 목에다가 닻을 내림을 알 수 있습니다. 배와 배사이의 간격이 없기에 이건 그냥 기동도 안하고 그 상태로 말둑을 박겠다는 뜻입니다. "여러 장수"라고 했으니 13척의 판옥선 장수중에 일부를 뜻합니다. 따라서 울돌목(진도대교)에서는 이런 작전을 못합니다. 끊었다는말은 "좁은목"을 배를 간격없이 대어서 뱃길을 끊었다는 뜻입니다. 단 1척의 배도 통과를 못하는것이 됩니다.

에도시대 후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문학 '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 에혼타이코키)'에 나오는 명량 해전 그림을 보시면 해전 장소가 "임하도(林下島)"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에도)시대에 그려진 그림 치고는 너무 잘 그렸습니다. (17세기후반)

아래의 그림을 보시면 "좁은 목"에서의 전투를 그렸습니다. 한쪽은 "섬"이고 다른 쪽은"육지"입니다. 그림에는 조선수군이 "좁은 목"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선들은 "좁은 목"을 통과하려는데 조선 수군의 함선에 막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또한 판옥선 말고도 다른 조선의 함선도 보입니다. 울돌목이라면 한쪽은 해남 육지이고 반대편은 진도인데 진도라면 엄청 큰 섬이기에 저렇게 작게 그릴 수는 없는 것이지요.

17세기의 일본 사람은 임하도를 알지 못했을 텐데 정성을 다해서 비슷하게 그렸습니다.

물론 회본태합기를 단순히 소설이라고 생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당시 일본인들도 명량해전이 임하도에서 발생했음을 인지했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17세기 이전부터 해전지가 임하도라는 걸 알았을 텐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명량해협의 울돌목으로 변경이 되었습니다. 이건 역사 왜곡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겨집니다.

회본태합기

좀서 상세히 설명하면 아래의 그림과 같습니다.

조선 수군 공격대: 통제사(統制使)이순신(李舜臣),김억추(金億秋),배흥립(裵興立),송여종(宋汝悰),정응두(丁應斗),안위(安衛),김응함(金應諴)

조선 수군 수비대: 민정붕(閔廷鵬),우수(禹壽),조계종(趙繼宗),이응표(李應彪),류형(柳珩),소계남(蘇季男),나대용(羅大用)등 기타 병력(기타 병력에는 의병부대도 포함)

임하도의 좁은목

해전 상황을 그려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조선수군은 병력을 쪼개서 한패는 임하도의 좁은목을 막게하고 이순신이 이끄는 공격대는 임하도를 우회하여 일본군과 교전을 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군선으로 위장한 어선은 임하도 서쪽해상에 진을 치고 있었을것으로 보입니다. 어선들도 전투에 가담한 기록이 있으므로 서쪽해역도 전투구역으로 봐야합니다.

 

 

당시 조선시대에는 임하도의 좁은 목이 항로였던 것 같습니다. {해남 주민에게 물어보니 지금은 다리가 있지만 아주 옛날에는 뱃길이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임하도에 계시는 주민분에게 물어보니 예전에 방조제가 놓이는 바람(지금은 다리)에 조류의 흐름이 막혀서 수심이 좀 낮아진 것 같다 했고 지금은 큰 배는 다닐 수 없다 하십니다. 그러나 500년 전에는 수심이 약간 깊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십니다.

그리고 국립 해양 문화재 연구소에서도 임하도의 좁은 목 주변으로 수중 문화재 탐사를 했지만 예전에 방조제가 놓이고 그걸 부수고 다리를 다시 놓는 바람에 수중환경이 훼손되어서 문화재 발굴은 실패했다고 했습니다. 다만 수중 시계는 매우 좋다고 했고 밀물시에는 배가 통과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왜군은 서해 물길을 잘 모르니 (밀물 시간에 맞추어서) 안전하게 항해하려다 좁은 목을 통과하려는 중에 막힌 것 같습니다.(어차피 임하도를 거쳐야 서해로 갈 수 있으니 통상 항로라고 봐도 될듯 합니다)

또한 임하도 좁은 목을 막은 이유중 하나는 "피난민(민간인) 보호"일듯 싶습니다. 임하도 뒤편은 하구가 있기에 피난선이 있을 만한 장소입니다. 또한 피난민들도 이곳에서 많이 탔을것입니다. 조선 수군 입장에서는 반드시 막아야 했던것으로 파악됩니다.

임하도 해역

왜 하필 임하도의 좁은 수로를 통과하려고 했을까요? 130척이 넘는 선단이었는데?라고 질문을 하실까 봐 저도 고민을 해봤는데 아마도 500년 전의 해상 지도와 지금의 지도는 달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간척 사업을 해서 갯벌 구간이 많이 육지화되었습니다. 왜군은 서해 물길을 잘 몰랐으니 육지에 가까이 붙어서 이동을 하려 했을 것이고 또한 임하도의 좁은 수로를 통과하는 것이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덜했을 것입니다. 혹은 일본군 장수가 판단 착오를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임팔 작전을 했던 "무타구치 렌야"를 들 수 있습니다. 임팔에서 판단 착오로 자기 군대를 순식간에 괴멸시킨 장수이기도 합니다.

왜군의 항로를 계산해보면 진도를 우회하지 않고 "울돌목"을 통과합니다. 당시엔 노를 저어서 움직이는 무동력선이었기에 지도상으로 울돌목과 임하도의 좁은 목을 통과하는 것은 항로로 봐야 합니다. 나이 드신 해남 주민에게 물어보니 궁항(A코스)이 있는 섬은 옛날에는 바다였다고 합니다. 궁항은 간척이 되기 전에는 항구 마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하도 서쪽 바다일 경우>>

일부 학자님들이 임하도 서쪽이 해전 장소라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저도 임진왜란 "산책'을 구입해서 읽어 봤습니다. 아쉽게도 임진왜란 산책은 해전 위치를 찾긴 찾았는데 방향이 틀렸습니다. 여기엔 한 가지 오류가 있는데 고대 문헌에서 말하는 "좁은 목"이 없고 넓은 해상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임하도 서쪽 바다에서 해전이 발생한다 가정하면 모든 조선수군의 전함이 임하도 서쪽 해역으로 이동을 할 것인데 왜군은 임하도의 좁은 목을 통과하여 조선수군의 후방을 공격하게 됩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기 쉽습니다. 또한 어외도로 퇴각하는 피난민들이 "학살"을 당했을 겁니다.

또한 별표(★)로 표시된 장소는 진도를 우회하는 해류와 울돌목을 통과하는 해류가 만나서 충돌하는 지점입니다. 잘못하다가는 조선 수군도 왜군도 표류(난파)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마씨가장"을 보면 " 명량싸움에 피란선 10여척과 함께 바깥바다에서 진을 벌리고 있다가"라고 했는데 군선으로 가장한 피난선들은 임하도 서쪽해역에 진을 치고 가만히 있었다는것을 말해줍니다. 조류가 반대로 바뀌는 시점에서 피난선들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가담하지 않았나 예상됩니다.  

 

따라서 임하도 서쪽 해상에서 전투를 했다 가정하면 임하도의 좁은 목을 막아야만이 서쪽해상에서 전투를 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조선 수군은 임하도 좁은목을 막아야 하기에 병력을 쪼갤 수밖에 없습니다. 병력을 쪼개니 전장도 쪼개지게 됩니다. 그러면 일본군의 병력도 당연히 쪼개지게 됩니다. 임하도의 서쪽 해상에서 마다시가 이끄는 130척의 선봉부대와 교전을 하고 그들을 무찌른 다음에 조선군은 당연히 임하도를 우회해야 합니다. 그래야 임하도 좁은 목 해역에 집결한 일본군 본대(도도다카토라&구루시마미치후사)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무찔렀다고 설명을 해야 "임하도 서쪽 해상설"도" 설득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조류 수치도 입니다. 국립 해양조사원에 들어가서 한번 살펴봤습니다. 아래의 조류 표를 보시면 임하도 해역의 조류 수치가 낮습니다. 명량해협 우수영 앞바다에서는 이곳이 해전 장소가 될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지도를 크게 확대를 해보면 다리가 아닌 방조제로 설정이 된 것 같기도 한데 지도는 업데이트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한 임하도 등대 쪽을 유심히 살펴보면 조류 수치가 약간 낮습니다. 진도의 넓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조류가 임하도를 치지만(80-100) 임하도의(80-100) 등대 부분의 섬에 막혀서 조류 수치가 60-80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조류 수치 표만 놓고 본다면 밀물이 조금 지난 후에는 조선 수군이 임하도를 우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조류 표를 보면 마진도와 진도 간의 거리는 약 4km이고 마진도와 임하도의 거리도 4km 정도 됩니다. 폭이 좁아지면서 물살이 거칠어지고 빨라집니다. 게다가 울돌목에서 올라오는 조류와 충돌을 해서 북쪽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올라갑니다. 따라서 당시의 무동력선(목선)은 노를 저어서 임하도 서쪽 해상을 통과하는 것은 어렵지 않나 짐작해봅니다.

 

나이 드신 현지 토박이 택시 기사님을 만나서 한번 여쭈어봤는데 임하도의 서쪽 해역은 울돌목에 비교하면 조류가 약하지만 옛날에는 작은 배들은 다니기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엔진 동력의 발달)

 

===경과===

"난중잡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군은 싸울 뜻이 없는 양 보이며 거짓으로 적의 포위 속으로 들어가니, 왜적은 아군의 두려워하고 겁냄을 기뻐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순신 함대의 전술은 임하도의 좁은 목을 막고서 일본 함대를 묶은 후 왜군의 배후(측면)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난중일기처럼 통제사의 대장선이 왜선 속으로 진입하자 왜군들은 웃으면서 농담 따먹기라도 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군의 전략은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에 대해 김중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김중걸은 지난 9월 6일 달마산 아래에서 적들에게 붙잡혀 묶인 채 왜선에 실렸는데, 임진년(1592)에 포로가 된 김해 사람이 왜장에게 잘 말해주어 결박이 풀린 채 배에서 함께 생활했다는 인물입니다, 김중걸은, 한밤중에 김해 사람이 자신의 귀에 대고 왜놈들의 의논 내용을 속삭여 주었다고 했으며 김해 사람은 어란 여인으로 추정하게 합니다.

"(며칠 전 벽파정 해전에서)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하여 군사를 사살하고 배를 불태웠다. 통분할 일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선들을 모두 불러 모아 합세해서 조선 수군을 섬멸하자. 그리고 곧장 경성으로 올라가자." -일본군-

13척의 판옥선에 대해서 왜선이 너무 많지 않은가? 에? 대한 의문을 가진 분들이 많아서 제가 한번 풀어봤습니다.

김중걸의 이야기가 맞는다면 1차적인 목적은 조선 수군의 섬멸과 2차적인 목적은 수송인 듯합니다.. 조선 수군의 섬멸과 수송을 동시에 진행을 하려다 보니 대규모의 선단이 꾸려진 것 같습니다.

@반대로 이순신 함대의 목적은?

임하도 수로를 막음으로써 1차적인 목적은 피난선(민) 보호이고 2차적인 목적은 왜선 격퇴인듯합니다.

피난선이 후방으로 퇴각할 수 있도록 지연전을 펼쳤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전술은 "화공"입니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을 포함하여 6명의 장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임하도의 수로가 140m 됩니다.(양쪽 갯벌 구간 포함하면 180m)

13척의 판옥선이 있었는데 난중일기에 기록되지 않은 장수는 저 좁은 목을 성벽처럼 틀어막고 있었을 것입니다. (선조실록에 기록된 배흥립은 통제사 쪽으로) "회본태합기"를 보면 판옥선 외에 작은 군선도 같이 수로를 막은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판옥선 6척에+초 탐선 수척(민간인 선박 포함)으로 보는 게 맞을 듯합니다..

일부 네티즌들은 양도선 수로에서 해전이 발생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풀어봤습니다.

양도 섬의 수로에서 명량해전이 있었다면 위에 지도를 보시면 입구는 폭이 484m이고 출구가 240m입니다. 저기의 수로를 막으려면 지도에 표시된 지점(240M지점)에서 막는게 최선입니다. 이충무공전서나 해남명량대첩비의 좁은 목에다가 닻을 내리고 함선을 대기 시킨다는 것은 길목을 차단하는것을 말합니다.

단 1척의 왜선도 보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길목을 차단하는 함선은 일정한 조건이 될때까지 그 자리를 사수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양도섬 안쪽 수로는 서해로 진출하는 길목이 아닙니다. 따라서 불필요하게 병력 분산이 이어지게 됩니다. 차단을 하더라도 모든 전선이 양도-진도(약 700m 넓이)사이에 포진해 있어야 하므로 양도-학동리를 통해서 진입하는 왜선을 막아낼 전력이 없답니다.

해전 지도만 놓고 보면 "임하도(명량해전)"와 "관음포(노량해전)"는 입구 폭은 거의 비슷합니다. 다만 깊이만 관음포가 약간 깊어 보입니다만 둘 다 간척이 되어버렸기에 조사를 해볼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간척 지대는"세광 염전"인데 비가 오는 날에는 휴무라고 합니다.

★갈대밭

명량해전 당시 갈대밭에서도 해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갈대밭 위치를 찹는다면 아래와 같지 않을까 합니다. 바로 세광염전자리입니다. 염전자리는 깊숙한 호수처럼 생겨서 물의 회전이 정체되는 구간입니다. 게다가 간척 전에는 갯벌이었을 가능성이 높기에 갈대가 있었을것으로 보입니다. 

통제사가 이끄는 공격대가 임하도를 우회해서 마다시를 먼저 격파를 합니다. 사료에는 일본군이 두 패로 갈라져서 대항했음을 기록하였습니다. 물론 사료에는 조선수군이 먼저 임하도를 우회했는지 마다시가 이끄는 선봉부대(130척)가 먼저 임하도를 우회해서 임하도 서쪽 해상에서 전투를 했는지는 불명확합니다. 다만 통제사의 지휘함 1척으로 130척의 왜선을 막아냈기에 조선수군이 먼저 임하도를 우회하려 했다고 설정했습니다. 임하도가 130척의 선봉부대가 북상하는 것을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했다고 가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묘중흥지에는 통제사가 마다시의 목을 효수하고 내도수와 도도다카토라의 본대를 도발하자 일본군이 두 패로 나누어서 공격을 한것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초반전투에도 두패로 나뉘고 후반전투에도 두패로 나뉘어서 전투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록에도 후반 전투에서 일본군이 두 패로 갈라서 조선수군에 대항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유해의 行狀에는 일본군 전체 왜선은 300여 척이고 그중에 마다시가 130척을 먼저 이끌고 통제사와 해상에서 교전을 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반 전투에서 일본군은 병력을 한번 분리해서 전투를 하고 후반 전투에서도 다시 두 패로 갈라서 전투를 치렀으니 전체 왜선은 300여 척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행상을 통해서도 일본군은 울돌목을 통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의 대장선은 좁은 목이 아닌 바다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十六일에 적선 三百여 척이 鳴梁을 거쳐 바로 우리 진을 향하여 올라오며 돛대가 바다를 뒤덮었는데 우리 수군은 다만 十여척이라 적은 군사로 많은 적병을 대적 키 어려워 여러 장수가 겁내지 않은 이가 없어 모두 퇴각하려 하였는데 공은 홀로 죽음을 각오하는 마음으로 바다 가운데에 닻을 놓고 여러 장수를 지휘하여 막아내게 하니 적이 대장이 있는 곳을 보고 百三十여 척으로 에워싸고 여러 겹을 하며 군사를 나누어 접전하매 태산을 계란을 누르는 것 같은 형국이었다. (최유해의-행상)

예상보다 왜선이 많다 보니(중과부적) 장수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김억추의 판옥선은 2 마장(대략 1km 이상) 이상 떨어졌습니다. 7척으로 배후(측면)를 공격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 듯싶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은 뒤돌아가서 장수들을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왜선이 많아서 할 수 없이 돌격을 합니다. 이때의 경험이 노량 관음포 해전에서 돌격(통제사 이순신의 사망)을 하는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명량해전 기록을 보면 "육박전"등을 연상케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난중잡록입니다. 왜선에서 불이 난다는 기록 등을 볼 때 이것은 해전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 사항이라 봅니다.

난중잡록의 저자인 의병장 조경남이 해안가 육지에서 봤다면 통제사의 해상 전투를 잘 못 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 다시는 13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바다에서 통제사랑 교전하는 사이 구루시마 미치후사나 도도다카토라의 함대는 울돌목을 통과 한 후 좁은 목을 통과하려고 했을 겁니다. "회본태합기"에도 "좁은 목"으로 일본군이 통과하려고 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수군의 피해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길목을 막고 사수하는 부대는 최대의 피해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단서는 있습니다. 김경수 편저의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1597년 9월 17일) 임치 첨사 홍견은 배에 격군이 없어서 나오지 못한다고 했다"라고 하였습니다. 분명 격군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에 격군은 full로 채워 넣고 전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격군이 부족하다는 것은 임치 첨사 홍견이 타고 있던 배는 상당한 전력 손실을 입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밀물에 좁은 목은 물이 빨려 들어가기에 왜선들이 철쇄에 걸린 것처럼 막혔으니 후진도 안되고 전진도 안되고 배는 돌리지 못하니 매우 갑갑했을 겁니다. 통제사는 이러한 이점을 이용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화공을 하기에 좋은 조건이 돼버린 셈입니다.

일본 측 기록인 "고산공실록"에 보면 "수군들이 잡혀갔다"란 기록이 있습니다. "고산공실록"은 후반 전투 기록이므로 왜선이 좌초되어서 갯벌에서 나와서 붙잡혔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난중잡록에도 "도망가는 자를 쫓아 수百여 놈을 베어 죽였다"라고 하였는데 좌초되어 육지로 나온 왜병들을 사살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의병부대도 명량해전에 참가를 했음을 알려주는 단서 같습니다. "조경남"은 의병부대 장수이므로 그가 거느린 부하들도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자 "송여종"과 "정응두"의 판옥선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은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조선 수군은 "항왜 준사"의 안목에 힘입어 적장 "마다시(칸 마타시로 마사케가로 추정)"를 붙잡고 처형을 시킨 후 효수를 합니다. 초반 전투에서 사기가 오른 조선군은 후반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승리를 거둡니다.

▶... 적은 우리 군사가 외롭고 약한 것을 보고 거저 삼킬 듯이 여겨 서로 앞을 다투어 사면으로 에워싸므로 우리 군사는 거짓 포위망 속으로 들어가니 적은 우리 군사가 겁내는 것을 기뻐하였다. 육박하여 난전이 되었을 때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를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도고(鼗鼓)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되니,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먼저 내 도수(來島守)의 목을 베어 머리를 장대 끝에 달자 병사들이 용기를 내어 도망가는 자를 쫓아 수百여 놈을 베어 죽였다. 도망간 배는 겨우 十여 척이었고 우리 배는 다 탈이 없었다. <난중잡록>"-의병장 조경남(1570~1641)◀

위에 난중잡록을 보면 "화전"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깐 화공이죠!! 난중일기에는 "화공"을 암시하는 문구가 없는데 누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명량대첩비도 화공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행록&amp;선묘중흥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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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시와 내도수의 고찰===

<선묘중흥지>를 읽어보면 통제사는 전선 30여 척을 깨뜨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선봉장의 목을 베어서 효수를 합니다. 난중일기에서는 "마다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마다시"입니다. 그런 후 난중일기에는 기록되지 않은 부분이 나옵니다. [화공으로 수효를 알 수 없는 적병이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 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도수(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사망하게 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來島守 乃悉兵前進 舳艫亘海 不知其際 而舜臣所領才十餘艘 舜臣領避亂餘船 列遙海爲疑兵 而中流下碇以當當之 賊先以百餘艟擁之 勢若風兩兩 諸將凶懼失色 謂舜臣不可復免 一時退散 舜臣親立船頭 厲聲督之 僉使金應誠 巨濟府使安衛等 回船以入 直撞其鋒 賊蟻附衛船幾陷 舜臣回船救之 立碎其兩船 頃刻之間 連破三十艘 斬其先鋒 賊大駭而却 舜臣懸賊船首 張樂船上以挑之 賊奮怒 分軍迭出 舜臣乘勝縱火 延爇諸船 赤焔漲海 賊兵燒溺死者 不知其數 遂殺來島守 毛利民部 落水僅免 其餘將帥 死者數人

▶안위 등이 배를 돌려 들어서서 적을 대항하자 적이 개미 때처럼 붙어 안위의 배가 거의 침몰하게 되므로 이순신이 배를 돌려 그것을 구원하고 그 자리에서 적선 두 척을 쳐부수고 잠시 동안에 삼십척을 연달아 깨뜨리며 그 선봉장의 목(마다시)을 베니 적이 크게 놀라 물러 갔다. 이순신이 적의 머리를 달아 매고 배 위에서 풍악을 치며 도전하니 적이 분노하여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나오는데 이순신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불을 놓아 여러 배들을 불태우니 시뻘건 불길이 바다를 덮은 속에서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적병이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며 마침내 내도수(구르시마 미치후사)를 죽이고 모리민부는 물에 떨어져서 죽음을 겨우 면했고 그 밖에도 적장의 죽은자가 몇 명 있었다.<선묘중흥지>◀

 

"난중잡록"이나"선묘중흥지"만 놓고보면"마다시"와"내도수"는 서로 다른 인물입니다.

마다시는 칸마타시로 마사케가(추정)"이며 내도수는"구루시마 미치후사"입니다. 그러면 마다시는 단지 선봉대를 이끄는 수장일 뿐이고 본대가 따로 있다는 의견입니다. 이유는 명량해전의 사령관은"도도다카토라"로 추측합니다. 단지 마다시가 죽었다는 이유로 모든 왜선이 도망을친다는 것은 납득이 안되는 부분입니다. 고산공실록의 기록이 상세하지 못해도(아마도 쪽팔렸을 것임) 오후까지 싸웠다면 열심히 싸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마다시가 이끄는 130척의 왜선에는 구루시마 미치후사나 도도다카토라의 기함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싸웠는데 조선군의 격침 전과가 30척밖에 되지 않는다면 이것도 문제가있는 겁니다.

[선묘중흥지에는"선봉장"과" "내도수(구루시마 미치후사)"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조선수군이 2패로 나누어서 각기 다른 작전을 하였고 의병장 조경남과 통제사의 동선이 달랐기에 난중일기에는"마다시"만 기록되었고 난중잡록에는"내도수"만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후대에 자료를 수집하여 검증하면서 선묘중흥지는"마다시"와"내도수"의 사망을 둘다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마다시"는 선봉부대의 선봉장일 뿐 왜선 전체 집단의 사령관은 아닙니다. 조선측 기록이 부실해서 마다시를 왜수군의 사령관으로 착각할수 있습니다.

 

===초반전투와 후반전투===

많은 네티즌들과 학자님들이 무슨 초반 전투 후반 전투냐고 따지실것입니다. 그런데 명량해전은 초반전투와 후반전투를 나누어서 공부를 하면 이해를 하실것입니다. 행록에도 조선수군은 2차례에 걸쳐서 전투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是日, 避亂人士登高峯見之, 則賊船來者, 只計其三百, 而餘不可盡記, 彌滿大海, 海不見水, 我舟只十餘, 不啻若壓卵, 而諸將於新喪之餘, 忽遇大賊, 心死魄奪, 皆欲退遁, 獨公有必死之志, 中流下碇, 爲賊所圍, 如雲埋霧合, 但見白刃飜空, 砲雷震海, 避亂人等, 相與痛哭曰, 我等之來, 只恃統制, 而今若此, 我將何歸, 俄見賊船稍退, 公所乘船, 兀立無恙, 賊分軍迭戰, 如是者終日, 賊大敗而走, 自是南民之倚公尤篤,<행록-이분>

**그날 피란하는 사람들이 높은 산 위에 올라가 바라보면서 적선이 들어오는 것을 三百까지는 헤아렸으나 그 나머지는 얼마인지 기록할 수 없었다. 그 큰 바다를 가득 메워 바닷물이 안 보일 지경인데 우리 배는 다만 十여 척이 러 마치 계란을 누르는 것 같을 뿐만 아니라 여러 장수들이 막 패전한 뒤에 갑자기 큰 적을 만난 것처럼 기운이 죽고 혼이 빠져 모두들 달아나려고만 할 뿐이었다. 다만 공만이 반드시 죽을 뜻이 있어 바다 복판에 닻을 내리자 적에게 포위를 당하니 마치 구름과 안갯속에 파묻힘과 같을 뿐이요. 시퍼런 칼날이 번뜩이고 공중에는 대포와 우레가 바다를 진동하였다. 피란하는 이들이 서로 보고 통곡하며 "우리들이 여기 온 것은 다만 통제사(統制)만 믿고 온 것인데 이제 이렇게 되니 우린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하였다. 얼마 있다 다시 보니 적선이 차츰 물러 나는데 공의 탄 배는 아무 탈 없이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적도 다시 패를 갈라 번차례로 싸우는데 이렇게 하기를 종일토록(했으며), 필경은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이로부터 남쪽 백성들이 공을 의지하는 마음이 더욱더 두터워졌다. <행록-이분>◀

<행록>에 의하면 피난민들이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해전을 관찰했는데 (당연히 배에 탄 사람은 잘 안 보일 것임) 초반에 먼저 전투가 벌어지고 좀 있다가 적선이 물러나는 걸 봅니다. 그 뒤에 왜군이 다시 공격을 하게 되고 하루 종일 전투를 치루지만 이때에 왜군이 대패를 하고 물러갑니다. 처음에 물러난 이유는 마다시가 사망했기 때문에 물러난 것입니다. 두 번째 격돌에서 일본군의 피해가 초반 전투보다 훨씬 심각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200~300척의 왜선도 파괴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묘 중흥지"와 "행록"을 통해서 조선수군은 두 차례의 해전을 치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반 전투에서 31척을 격파하고 마다시를 사살했으며 후반 전투에서는 내도수(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사살하고 화공으로 많은 수의 왜선을 불태웠던 것입니다. 도도 다카토라가 부상을 당하고 자기 배가 절반이나 손실을 입은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도도다카토라와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초반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후반 전투에 참여를 했던 것입니다. 난중일기는 초반 전투기록을 상세히 기록을 해둔 것입니다. 후반전투기록을 왜 안 적고 대충 넘어갔는지는 이순신 장군만이 아는 문제같습니다. 당시에 이순신 장군을 잡아 먹을려는 정치인들이 있었기에 전과를 낮게 잡아서 장계를 올렸는지도 모릅니다. 추측만 할뿐입니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선봉장인가?==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선봉장이 아닙니다. 그는 영주(당주)급 인물이기에 선봉장이 되기 어려운 조건입니다. 선봉장은 말 그대로 최전방에서 적군의 사기를 꺾거나 본대를 와해시킬 목적으로 1순위로 접전하는 부대이기에 사상자가 많이 나옵니다. 당시 일본 계급사회에서는 영주(당주)가 먼저 죽을 수 없기에 선봉장이 된다는 것은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게다가 선봉대가 있으면 뒤에 따라오는 본대가 반드시 있습니다. 선봉대가 무너졌다고 해서 일본군 전체가 무너진 건 아닙니다. 선묘 중흥지를 통해서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수로 대장으로 임명되어 일본군을 통솔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일본군은 서해 물길을 잘 몰랐기에 구루시마 미치후사(내도수)에게 의존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선봉장으로 출전해서 먼저 죽어버리면 일본수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 있기에 도도다카토라도 선봉장으로 내세울 용기는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어란진 해전과 벽파진 해전에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장수를 선봉대로 내세워 싸우게 했습니다. <아래 선묘 중흥지 그림 참조> 다만 어란포 해전은 8척을 격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선묘 중흥지는 9척으로 해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깐 10척이 약간 넘는 전선을 이끌고 어란 해역으로 왔다가 그중9척을 조선수군과 싸우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난중일기에는 벽파진 해전에 참가한 일본군 병력이 한산도 해전에서 원균을 무찌른 부대임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다. "-난중일기, 정유년 9월 7일>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벽파진 해전에 참가하지 않았기에 더 유추하면 그는 한산도해전(원균 사망)에는 참가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내도수로 수로대장을 삼아 모리민부등 여러장수들의 千여척의 군사들을 영솔하고 서해로 올라가게 하였다. 내도수가가 먼저 9척의 배를 보내어 시험하므로 이순신이 처서 물리쳤으며 또 밤에도 군사를 보내어 대포를 쏘며 놀래어 주므로 이순신도 역시 대포를 쏘도록 명령했더니 적이 움직이지 못한줄 알고 물러갔다.<선묘중흥지 해석본>◀

선묘중흥지는 일본군이 밤에 대포를 쐈다고 해석하였는데 아마도 벽파진 해전인것 같습니다. 벽파진은 야간전투였기 때문입니다. 실제 일본군이 대포를 쐈는지는 모릅니다. 야간에 총소리가 대포소리로 들렸을지도 모릅니다.(추측)

해전이 끝난 후 조선 수군은 당사도로 진을 옮깁니다. 여기서 일본 학자들하고 충돌이 발생하는데요. 조선 수군이 철수를 했기 때문에 왜군이 서해 진출에 성공을 했다고 분석을 내놓습니다. 그런데 왜 수군이 서해 진출을 주장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만족시켜야 합니다.

​1) 그날 밤에 당사도에 진을 치고 있는 조선 수군을 괴멸시켰는가?(조선 수군을 괴멸시키지 못한다면 끝까지 서해의 물자 수송을 방해할 것이므로)

2) 왜군이 바라던 물자 수송을 경성(한양)으로 보냈는가?(물자 수송을 하지 못한 것은 완전한 서해 진출에 실패한 것이다)

3) 분탕질을 하지 않았는가?(분탕질을 했다면 심리적으로 패배를 인정한 것이 된다)

그러나 조선 수군도 전력상 후퇴를 한 것이므로 우수영을 왜군에게 내준 것은 사실입니다. 난중일기 9월 14일자를 보면 우수영 주민들에게 피난할 것을 권고합니다. 주민 소개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피난선들은 어외도등 북쪽으로 대거 피난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해전 위치에 대한 고찰==

1872년 진도 지방지도입니다. "오양탄(嗚洋灘)"이 지도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충무공 이순신이 대첩한 곳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기가 "울돌목"혹은 "명량해협"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울돌목"과 "오양탄"은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울돌목은 "소리를 내어 우는 바다 길목 "이라는 뜻입니다. 탄식하다, 슬프다의 뜻을 가진 "오양탄"하고는 의미가 다릅니다.

그리고 "오양탄"이 우수영과 녹진 사이가 아닌 우수영 밖에 있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1872년 진도 지방지도를 통해서 명량해전 위치가 우수영 경계 밖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도를 분석해 보면 우수영 성벽을 경계로 삼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서상리가 경계지점입니다. 우수영 성벽이 서상리가 끝자락이기 때문입니다. "오양탄"은 오늘날의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예락리"에 붙어있게 됩니다. 또한 오양탄은 우수영-녹진 사이에 있는 울돌목(진도대교)이 아닌 해남 땅에 붙은 "얕은 여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872년 진도 지방지도는 규장각에서 열어볼 수 있습니다.

https://kyudb.snu.ac.kr/

규장각 홈페이지에 접속하시면 상단 메뉴에서 "고지도"클릭하신 후 "지역별 보기"를 클릭합니다. 그런 다음 지역에서 "전라도"의 "진도"를 클릭하시면 1872년 진도 지방지도가 나옵니다. 첫 번째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광여도"나 "청구 요람"등에는 이순신 장군이 대첩한 곳을 "명양(鳴洋)"으로 기재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도에서 울돌목 옆으로 붓으로 적어놨습니다. 그래서 "울돌목"이 전쟁터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장소에 오류가 있습니다. "명양(鳴洋)"을 해석하면 "우는 바다"가 됩니다. 넓은 의미로 생각해야 합니다. 대첩비에는 "울돌목으로 들어가는 목"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문을 읽다 보면"울돌목"에서의 싸움이 가장 통쾌한 승리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누가 봐도 "울돌목(해남-진도:진도대교)"에서 해전이 발생했다고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 해전 장소는 "명량 입구"를 암시하고 있는데 명량해협 입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집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문이 있습니다. 대문입니다. 대문을 통과하면 마당이 나오고 집으로 들어가려면 현관문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대문도 엄연히 "건축물"의 일부입니다."광여도"나 "청구 요람"에는 임하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명량"에서 충무공이 대첩했다라고만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해남-진도(진도대교) 사이의 울돌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명량해협 전체를 지칭하는 단어라 판단됩니다.

@모리고동문서@

たいたんむろのむかひ水営と申城の瀬戸口ニ番舟・大船拾四艘、其外小舟数百艘かゝり居申候条、即十六日押懸申候而、卯刻より申刻迄相戦申候事

하나. 타이탄무로(진도)의 건너편 수영과 신성 해협의 입구에 조선수군 대선14척 그 외 작은배 수백척이 정박해 있어 즉시 16일 쳐들어가 새벽6시부터 오후4시까지 싸움을 했음.

모리고동문서에는 "신성해협입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협의 입구"라고 했으니 울돌목은 제외가 됩니다. 울돌목은 신성해협(명량해협)의 입구가 되겠으나 임하도에서 명량해협으로 들어오는 배는 임하도 해역이 입구가 됩니다. 해협 입구라고 했으니 둘 중 하나입니다. 벽파진 앞바다 혹은 임하도 앞바다가 후보로 나옵니다.

그런데 울돌목에서 싸우게 되면 명량을 등지게 되므로 사료에도 맞지 않고 조선수군이 가장 위험한 장소입니다. "벽파진해전"후로 명량을 등질수 없다하여 수군 진영을 벽파정-->우수영 앞바다로 옮기게 되니 모리고동문서에서 기록된 신성 해협의 입구는 "임하도 앞바다"가 됩니다.

一申刻迄相戦、則見合を以悉可討果与存候刻、大風吹出、番船依為案内者、遠嶋帆に任逃退申候、則六七里斗追懸雖申候、暮に及、其上嶋〻無案内ニ付而、番舟の小舟共数艘やきわり申候事

하나. 오후 4기까지의 싸웠고 드디어 적을 실로 토벌하려는 순간 큰 바람이 불고 조선 배가 지형을 잘 아는 것에 의지해 먼 섬으로 돛을 올리고 도망가 즉시 6,7리를 추격했는데 날이 저물고 그 섬과 섬을 잘 몰라서 조선 수군의 작은 배 수척을 부수고 들어온 일.

모리고동문서에는늦은 오후가 되자 조선의 배가 퇴각을 하게 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선이 6-7리를추격 했는데 섬과 섬사이를 잘 몰라서 조선 수군의 작은 배 수척을 부수고 돌아왔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면 6-7리를 추격했다면 대략2.5km를 추격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 조건을 울돌목에 대입을 하니 맞지 않았습니다.울돌목에서는 방향이 달라서 당사도(먼섬)가는 조선수군을 볼 수 없습니다. 임하도를 대입을 하니 조선 수군이 먼섬(당사도)으로가는걸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수군은 기록상으로도 서해지리 및 물살을 잘몰랐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육지랑 가까이 붙어서 서해로 북상하려했을 것입니다.

@고산공실록@

御歸陣被成候

ちとまへかとにこもかいへ御こしなされ候

処にすいえんと申所にはん舟の大しやう分十三そうい申候

大川のせよりはやきしはのさし引御さ候 所の內にちとしほのやハらき申候

所に十三そうのふねい申候

조금 전에 제포薺浦에 가셨습니다.

'수영'이라는 곳에 조선 대장선 13척이 있었습니다.

큰 강의 여울목에서 바닷물의 간만이 빠른 해역인데, 약간 바닷물의 흐름이 약해진 구역에

13척의 배가 있었습니다.

큰 강은 "모리고동문서"에서 말하는 신성 해협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여울목은 울돌목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울독목이 바닷물의 조수가 빠른 구역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약간 바닷물의 흐름이 약해진 구역에 조선의 판옥선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살이 빠른 울돌목을 통과하면서 바닷물의 흐름이 약해진 구역에 당도하자 전투가 벌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임하도 해역이 가장 타당성이 높습니다. 조선수군이 매복하기 좋은 곳이 임하도 해역이기 때문입니다.

朝の五しふんより酉の刻まて御合戰にて御座候

みなとのやうすはん船能存候に付風を能見すまし

其せと口をめけほをひきかけはしらせ申について是非なくおつかけ申儀もまかいならす

いつみ樣も手を二か所おはせられ候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싸웠습니다.

항구의 모습이나 적선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으므로, 바람의 방향도 잘 판단하여서

그 좁은 해역을 벗어나 돛을 끌어당겨 달렸습니다. 그 때문에 적도 어쩔 수 없이 추격할 수 없었습니다.

이쯔미 님(和泉樣,도도 다까도라藤堂高虎를 말함, 좌군 소속 대장)도 팔 두 곳을 부상당했습니다.)

일본군은 하루종일 싸웠습니다. 아침 8시부터 저녁6시까지 싸웠다면 행상에서의 기록대로 종일토록 싸운것입니다. 그런데 고산공실록도 초반전투기록이 누락되었습니다. 일부러 안적은것 같습니다.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을 한것으로 미루어 그는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는 일본군 장수였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다시는 선봉장이기는 하지만 직급이 구루시마 미치후사보다는 낮았던것 같습니다.

다만 "연려실기술"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순신이 군사를 돌려서 우수영 명량 앞바다에 있는데 날이 밝아오자 적선 5, 6백 척이 바다를 가리고 왔다. 적의 장수 마다시(馬多時)는 본래 수전을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다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때 호남 백성들이 배를 타고 피난가던 자가 모두 진 아래 모여서 순신을 의지하여 생명을 보전하고 있었다. ...(중략)... 자신은 전함을 거느리고 적군 앞을 가로막고 진하니 깃발을 단 층각배가 바다 위에 가득히 찼으므로 우리 군사가 보고 얼굴빛이 변하였다.그때 아침 조수가 막 밀려 나가는 중이라 항구에는 물결이 사나웠다. 거제 현령 안위(安衛)가 조수를 타고 내려갔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배가 화살처럼 나아갔다. ...(이하 생략)...<연려실기술>◀

"마다시"에 대한 이름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다시가 일본수군의 사령관쯤 되는 인물로 묘사된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마다시는 구루시마 미치후사 못지않게 수전을 잘하는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걸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선봉장의 역할이 컸습니다. 삼국지를 읽어봐도 선봉장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령관의 이름보다 선봉장의 이름을 더 잘 기억합니다. 저는 조조보다 하후돈의 이름을 더 잘 기억하는 성격입니다. 하후돈이 더 무섭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첩보를 통해서 선봉장이 마다시라는것 미리 알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결론===

통제사가 이끄는 조선수군은 명량해협을 등질수 없다하여 명량 앞바다인 임하도 해역으로 수군진을 옮긴것으로 파악됩니다. 수군진을 바다위에 세울수 없으니 섬으로 옮긴것입니다.

"통제사(統制使)이공(李公)늬 유사"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밤에 적이 반드시 우리를 습격할 것이니, 여러 장수들은 각각 군대를 정돈하고 경계를 엄중히 해야 한다.”하였다. 그런데 이날 밤에 적이 과연 군대를 비밀리에 출동하여 쳐들어왔다. 그러자 공이 스스로 일어나 큰 소리로 호통을 쳐서 제군(諸軍)들로 하여금 동요하지 말고 각각 닻을 내리고 기다리게 하여 더욱 강력히 싸움을 독책하니, 적이 포위망을 풀고 가므로 공은 회군(回軍)하여 우수영(右水營)의 명량(鳴梁) 앞바다로 와서 있었다.

명량해전은 피란민들이 안전하게 후방으로 퇴각하는데 중점을 둔 "후퇴 및 지연작전"이었으며 피란민들이 후방으로 이동할 시간을 벌어줬다는 결과를 내놓고 싶습니다. 또한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전투라고 평가를 드립니다. 또한 회본태합기를 통해서 해전 장소가 임하도임을 가르키고 있으며 임하도 해역에서의 작전을 위해서 조선수군은 병력을 쪼개서 서로 다른 작전을 수행하였고 초반 전투에서 마다시를 사살하고 후반전투에서 화공으로 왜선을 많이 불태우고 내도수(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사살했다고 결론을 드립니다.

=====기타 사료=====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

(선묘중흥지는 선봉장(마다시)내도수를 구분해서 기록하고 있으며 이것은 마다시와 내도수는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것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목할 부분은 "모리민부"가 바다에 떨어졌다가 구조되었다는 내용인데 이것은 일본측 기록인 고산공실록에도 기록된 인물입니다. 따라서 상당히 신뢰할만한 사료입니다.)

1587년(선조 20)부터 1607년(선조 40)까지 임진왜란의 전말, 극복 과정, 전후 교섭 등을 기술한 책

"내도수가 군사들을 죄다 이끌고 전진하니 배가 꼬리를 물고 바다를 덮어 그 끝을 알 수 없었는데, 이순신의 거느린배는 고작 십여척뿐이었다. 이순신은 피난민의 여러 배들을 먼 곳에 벌려 군함인 것처럼 만들어 놓고 바다 한가운데 닻을 내리고 대항하였다. 적은 먼저 백 여척의 배로써 포위했는데 형세가 마치 풍우 몰아치는 듯하므로 장수들이 겁내어 안색이 변해지며 이순신으로도 죽음을 면할 수 없이 되었다 하고 일제히 물러갔다. 이순신이 친히 뱃머리에서 소리를 높여 독려하니 첨사 김응함과 거제 현령 안위 등이 배를 돌려 들어서서 적을 대항하자 적이 개미떼처럼 붙어 안위의 배가 거의 침몰하게 되므로 이순신이 배를 돌려 그것을 구원하고 그 자리에서 적선 두 척을 쳐부수고 잠시 동안에 삼십 척을 연달아 깨뜨리며 그 선봉장의 목을 베니 적이 크게 놀라 물러갔다. 이순신이 적의 머리를 달아매고 배 위에서 풍악을 치며 도전하니 적이 분노하여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나오는데 이순신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불을 놓아 여러 배들을 불태우니 시뻘건 불길이 바다를 덮은 속에서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적병이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며 마침내 내도수(來島守)를 죽이고 모리민부는 물에 떨어져서 죽음을 겨우 면했고 그 밖에도 적장의 죽은자가 몇 명 있었다."

===고산공실록-도도다카토라의 실전기록===

<해석본>

그곳에서 모리민부 대부(毛利民部 大夫, 좌군의 행정담당관 毛利高政) 님이 세끼부네를 타고 적선을 공격했습니다.

적선으로 뛰어들어가기 위해 十字 모양의 낫을 걸었습니다만,

적선으로부터 활과 총탄이 격렬하게 퍼부었므로 배를 떠나 바다로 들어가 위험하게 되었는데,

(그때)'도도 송하찌로(藤堂孫八郎)'와 '도도 강까이유(藤堂勘解由)' 두 사람의 배가 다가와서 적선들을 밀어제친 후 구해드렸습니다.

===통제사 이순신 -난중일기===

(난중일기를 통해서 초반 전투의 어려움과 해전 상황을 살펴볼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후반 전투에 관한 기록이 누락되어서 명량해전의 전체 해전 경과를 살펴볼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료인 "난중잡록""선묘중흥지""고산공실록"등을 참고해서 명량해전의 전체 상황을 파악하여야 합니다.)

十六 일 (甲辰) 맑다. 이른 아침에 別望軍(별망군)이 나와 보고하되 「적선이 얼마인지는 모르겠는데(鳴梁을 거쳐-草稿)우리 배를 향하여 들어온다」한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들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三 백 三十 여척(草稿에는 百三十 여척˚ 또 한 군데의 草稿에는 百三十三 척)이 우리 여러 배를 에워싼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적할 수 없다고 스스로 낙심하고 모두 회피할 꾀만 내는데 右水使 金億秋(김억추)는 벌써 아득한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벌써 二 마장 밖에 있었다.-草稿)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매 地 玄字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아 바람 우레같이 터지고 軍官들도 배 위에 가득 서서 빗발같이 쏘아 내니 적들은 당적 하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나 그래도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얼굴빛이 죽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이 비록 千 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적 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하고 여러 장수의 배들을 돌아보니 먼바다에 물러나 있으면서 바라보고만 나오지 않는 것이다. 배를 돌려 바로 中軍 金應諴(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그의 목을 베어 효시하도고 싶으나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츰 더 멀리 물러나고 게다가 적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면 사세가 낭패될까 두려워서 곧 호각을 불어 中軍令下旗(중군영하기)를 세우고 또 超搖旗(초요기)를 세우니 中軍將 彌助項僉使 金應諴(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로 가까이 오고 巨濟縣令 安衛(안위)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위 安衛를 불러 「安衛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하니 安衛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다시 金應諴을 불러 「 너는 中軍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라」하고 두 배가 바로 들어가 접전하는데 적장이 그 휘하선 세척을 지휘하여(草稿에는 적장 선과 다른 배 두척과 합하여 세척이라고 되어 있음)한꺼번에 安衛의 배에 개미 붙듯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安衛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기로 맹세하고 싸우는데(혹은 모난 몽둥이를 쥐고 혹은 긴 창을 쥐고 또 혹은 水磨石 덩어리로 함부로 치고 때리며-草稿)힘이 거의 다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배를 돌려 바로 들어가 빗발치듯 마구 쏘아 적선 세 척을 남김없이 무찔렀는데 鹿島萬戶 宋汝淙(송여종)과 平山浦代將 丁應斗(정응두)의 배가 잇대어 와서 협력하여 적을 쏘았다.(몸을 움직이는 적은 한 놈도 없었다.-草稿)항복한 왜인 俊沙(준사)란 자는 安骨浦 적진에서 투항해 온자로서 내 배 위에 타고 있다가 내려다보며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 옷을 입은 놈이 安骨陣의 적장 馬多時(마다시)라」한다. 나는 金石孫(김석손)(草稿에는 無上 金乭孫)을 시켜 갈고리를 던져 배 위로 끌어 올리게 했더니 俊沙가 뛰며 하는 말이 「이자가 馬多時다」 하고 말을 하므로 곧 명령하여 토막 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여 버렸다. 우리 여러 배들이 일제히 북을 울리며 나가 각각 地 玄字 대포를 쏘고 또 화살을 빗발같이 쏘아 적선 三十一(草稿은 두 가지인데 먼저 쓴 데는 三十 척 나중에 쓴 데는 三十一 척으로 되어 있다.)을 깨뜨리자 적선이 퇴각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니 이는 실로 천행이다.(싸움하고 싶었던 바다에서 그대로 정박하고 싶었으나-草稿)물결이 아주 험하고(또 바람조차 역풍인데다-草稿)형세도 외롭기 때문에 진을 唐笥島[당사도](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당사리)로 옮겼다.

===최유해 -行狀===

(최유해의 행상에는 초반전투 기록이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명량해전에 참전한 왜군수는 삼백여척으로 기록되었으며 그중 마다시가 이끄는 130여척은 선봉부대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일본군도 병력을 분리한것으로 파악됩니다. 또한 일본수군은 명량을 통과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十六일에 적선 三百여 척이 鳴梁을 거쳐 바로 우리진을 향하여 올라오며 돛대가 바다를 뒤덮었는데 우리 수군은 다만 十여척이라 적은 군사로 많은 적병을 대적키 어려워 여러 장수가 겁내지 않은 이가 없어 모두 퇴각하려 하였는데 공은 홀로 죽음을 각오하는 마음으로 바다 가운데에 닻을 놓고 여러 장수를 지휘하여 막아내게 하니 적이 대장이 있는 곳을 보고 百三十여 척으로 에워싸고 여러 겹을 하며 군사를 나누어 접전하매 태산을 계란을 누르는 것 같은 형국이었다. 공이 북채를 잡고 우뚝 서서 크게 소리쳐 기운을 돋구니 모두들 죽음 힘을 다하는데 만일 여러 장수 중에 조금이라도 물러서는 자는 먼저 찢어 죽여 조리를 돌리라 하였다. 첨사 김응함이 앞서서 돌입하고 거제현령 안위가 뒤를 따르는데 공의 큰 소리로 외치되 “안위야, 안위야, 네가 도망 간다고 살 듯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하니 안위가 드디어 곧장 적의 선봉을 치고 들어가자 적선 三척이 개미 떼 같이 붙어서 거의 침몰하게 되었는데 衛도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워 마침내 적선이 침몰되고 적의 기세가 조금 꺽이었다. 공의 독전은 더욱 엄하고 여러 장수들이 번갈아 진격하여 적선 三十여척을 쳐부수니 적이 대적치 못하고 포위를 풀고 도망가는데 비단 옷을 입은 적이 바다에 뜬 것을 보고는 항복해온 왜인인 준사가 그것을 가르켜 “안골진의 왜장 마다시라”하였다. 이에 공이 갈쿠리로 끌어 당겨 목을 베었다.

===馬氏家狀===

(마씨가장을 통해서 피란민들중 일부는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가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馬河秀는 장흥(長興) 사람이요. 벼슬은 繕工主簿였다. 정유년에 배 한 척을 만들어 해상에서 피란하다가 李統制가 복직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우리들이 무엇을 걱정하랴”하고 會寧浦로 가서 문안을 드리니 李 공이 말하되 “칼날을 무릅쓰고 찾아오니 무척 수고했구려, 그대의 고을에서 온 피난선이 몇 척인고”하니 공은 “10척가량 됩니다.”라고 대답했더니 李 공이“그대는 배들을 모아 나의 후원이 되어 군대의 위용을 도와준다면 큰 보조가 될 것이다” 하므로, 그는 “ 제가 비록 늙었으나 공과 함께 죽고 삶을 같이 하겠습니다.”했더니 이에 李 공이 극구 칭찬을 하는 것이었다. 공이 물러 나와 시 한수를 지었는데

*문화와 예절 바른 성스러운 선조의 나라/ 어쩌다 추악한 오랑캐가 쳐들어오나/ 사나이 늙었어도 장한 이 마음/ 이야말로 전쟁에서 죽을 때로다.

그때 백진남(白振南), 김성원(金聲遠), 문영개(文英凱), 변홍원(卞弘源), 백선명(白善鳴), 김택남(金澤南), 임영개(任永凱) 등 10여인이 피난선을 가지고 와 모였는데 정명설(丁鳴說)도 역시 그 가운데에 끼어 있다가 공을 찾아와 “우리들이 본래부터 길러온 충성심인데 오늘날을 당하여 늦춰서는 안 됩니다.” 듣자오니 이통상(李統相)이 방금 피난선으로 하여금 먼바다에 열 지어 군대같이 가장하라 하시니 “이 기회를 타서 같이 나간다면 파죽(破竹)의 승세(勝勢)가 오직 이 한 번에 있을 것이요”라고 하자 공도 ”내 마음도 벌써 정했다“고 대답했다.

명량싸움에 피란선 10여척과 함께 바깥바다에서 진을 벌리고 있다가 李 공이 적에게 포위됨을 바라보고는 칼을 뽑아들며 ”대장부가 죽어야 한다.“하며 두 아들 성룡(成龍), 위룡(爲龍)을 대리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오래도록 힘껏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성룡(成龍)과 위룡(爲龍)이 아비의 시체를 안고 돌아와 피난선에 올려놓은 다음에 칼을 들고 적진으로 다시 돌진하자 적은 이미 李 공에게 패하여 군사를 몰고 도망가므로 다시 분을 풀 곳이 없었다.

=== 忠愍祠記(충민사기) ===

(충민사기는 영의정 [[이항복]]이 작성을 한것으로 조선수군의 명량해전 기록이 실려있습니다. 조선 수군은 두번을 격돌했는데, 첫번째 전투에서 31척을 깨뜨리자 적이 조금 퇴각했는데(마다시의 죽음이 퇴각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 수군이 진격하자 일본군은 "죽어 쓰러지며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는데, 후반 전투에서 일본군은 (심각한)피해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통제사가 돛대를 친 이유는 돛대에 "마다시"의 목이 걸려 있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일본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거나 흥분시켜서 도발을 하는 목적입니다. 선묘증흥지에는 "풍악"까지 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후반전투에서 조선수군은 일본군을 깨부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공세를 했다는 것입니다.)

*賊見公整船而出 各促櫓直進 旌旗樓櫓 彌滿海中 時早潮方退 港口湍悍 臣濟縣令安衛 順潮而下 風便迅駛 船行如箭 直衝衝前 賊四面圍拘 衛冒死突戰 公督諸軍繼之 先破賊船三十一艘 賊少却 公擊楫誓衆 乘勝而進 賊死咋不敢抵敵 擧軍而遁 公亦移陣於寶花島

"적은 공이 배를 정비하고 나오는 것을 보고는 각각 노를 재촉하여 바로 진격해 오는데 깃발과 돛대가 바다를 덮었었다./

때에 마침 조수가 방금 물러가는 때라 항구의 물살은 급한데 거제 현령 안위가 조수를 따라 내려가며 바람을 타고 빨리 달려 배가 마치 화살같이 적진으로 돌격하자 적이 사방으로 에워싸건만 안위는 주검을 무릅쓰고 돌진하였다. 공도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그 뒤를 계속하여 먼저 적선 삼십일 척을 깨뜨리니 적은 조금 퇴각하였다./ 공은 돛대를 치며 군중에 맹세하고 승전한 기세로 진격하니 적들은 죽어 쓰러지며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모두들 도망가고 공도 또한 진을 보화도(寶化島)로 옮겼다."

===전풍상의 증언===

(전풍상의 증언으로 산도가 도도다카토라임을 알게 해줍니다. 그는 120여척의 배를 본국에서 가져왔으며 그 중 절반의 병력이 피해를 보았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산공실록에도 자기부하 과반수가 죽거나 잡혀갔다는 기록이 있기에 신빙성이 있으며, 도도다카토라가 순천 왜성을 축성한 인물이기에 산도는 도도다카토라입니다. 따라서 도도다카토라가 120여척을 통솔했다고 가정하면 최유해의 행상과 비교해서 마다시는 130척을 통솔했고 내도수(구루시마 미치후사)는 50여척을 통솔했고 도도다카토라가 120척을 통솔한 것이므로 총300척입니다. 여기에 다른 왜장도 참여를 했기에 +@를 대입하면 330여척도 가능합니다.)

▶“지난 임진년 8월 산골로 피란했다가 왜적에게 잡혔는데 왜장 산도(山道)의 진중에 소속되어 안골포(安骨浦)에 한달 남짓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산도를 따라 바다를 건너 일본의 국도(國都)에서 동쪽으로 하룻길인 진역군리(鎭域軍里)에 도착했는데 진역군리는 바로 산도가 다스리는 고을이었습니다. 또 산도에게 딸린 부장(副將) 우다능기(尤多凌其)의 종이 되어 복역하면서 이따금 문서(文書)를 선소(船所)에 송달하기도 했는데 대체로 우다능기는 바로 산도가 관할하는 전선(戰船)의 장수였습니다. 선척의 숫자는 1백 20여 척으로 지난해 6월 산도가 재차 자기 소속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부산포(釜山浦)에 정박하였고, 7월 사이에는 한산도(閑山島)에서 접전한 뒤에 하동(河東) 앞 포구에서 하륙(下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구례(求禮) 지방을 거쳐 남원(南原)을 함락시키고 전주(全州)에 도착했다가 즉시 하동으로 돌아왔는데 대개 갔다가 돌아온 기간이 20여 일이었습니다. 또 하동에서 열흘 간 머문 뒤에 산도(山道)가 선척을 다 거느리고 수로(水路)를 따라 순천(順天)·흥양(興陽)을 거쳐 우수영(右水營)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통제사(統制使)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그리하여 무안(務安) 지방으로 후퇴하여 정박하면서 날마다 분탕질을 한 뒤에 다시 순천으로 들어와서 왜교(倭橋)에다 성을 쌓고 주난궁(走難宮)에게 지키도록 한 다음 산도는 즉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우다능기를 따라 광양(光陽) 지방의 장도(獐島)에 옮겨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또 우다능기가 일본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기별을 듣고 고향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밤을 타서 도망와 현감(縣監)에게 자수(自首)해 온 것입니다.◀

순천왜교성은 육군 장수인 우끼다히데이(宇喜多秀家)와 수군장수인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山道))가 축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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