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썰~

[임진왜란]한산도대첩 위치는 한산도 남쪽이었다.?

사랑의열매를주는나무 2024. 12. 13.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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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한산도 대첩이 발생한 위치에 대해서 한번 썰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이 아니 절대다수가 한산도 대첩은 한산도 "화도"옆의 해상에서 벌어졌다고 말을 합니다. 
그림으로 설명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한산도 대첩이 발생한 위치를 좀더 남쪽인 한산도 해역밖으로 계산을 했습니다. 그림으로 설명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블로그 쥔장이 한산도 대첩위치를 한산도 외곽 "용초도"와 "비진도", "연대도"를 걸치는 지역으로 추정한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는 넓습니다. 

 

화도 옆의 해상은 비좁고, 당시로써는 대형 전함인 판옥선이 수척은 쉽게 기동은 할 수 있어도, 50척이 넘는 조선수군 판옥선과, 70척이 넘는 일본군 왜선이 충돌을 해서 전투를 벌일만한 해상이 아닙니다.  한산도 남쪽지역인  "용초도", "비진도", "연대도"가 학익진을 펼치기에 매우 적합합니다. 
그리고 화도와 미륵도 사이의 바다는 겉으로 봐서는 견내량보다 넓어 보이지만, 지도를 더 크게 하면 견내량보다 조금 더 커질 뿐 비좁은 해역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아래의 그림을 보시면 이해를 하실 것입니다.

 

 

 
▶둘째는 선조실록의 기록에는 해전은 "한산 앞바다"에서 벌어졌습니다. 

 

<7월 6일에 순신이 억 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선조실록)>
 
선조실록에는 왜적들을 한산 앞바다로 끌어내어서 해전을 치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화도옆 해상은 지리적으로나 위치상으로 봐도 한산 앞바다는 아닙니다.  내양(內洋)이라고 봐야 합니다. 

 

<해석>
선조실록을 다시 해석을 해보겠습니다. 물론 제 생각대로 해석을 한 것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선조실록)
 
위에 글을 다시 정리하면  조선군은 7월 6일에 적선 70여 척이 견내량에 정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문제는 7일입니다. 7월 7일에 왜군이 어떻게 행동을 했는지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습니다. 
7월 8일에 조선수군은 열심히 노를 저어서 바다 가운데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다는 "넓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므로 일단 조선수군은 한산도 해역 인근까지 들어왔다고 해석했습니다. 
 
선발대로 보이는 왜선은 조선수군이 강성한 것을 알고서는 노를 저어서 되돌아갔는데, 조선수군은 "모든 군사"가 추격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모든 군사가 추격했으므로 50척이 넘는 판옥선이 한꺼번에 추격을 했다는 뜻으로 풀이했습니다. 
조선수군이 한꺼번에 왜선을 추격했는데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진을 치고 있었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조선수군은 70여 척이나 되는 왜선을 끌어내기 위해서 견내량을 통과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견내량은 좁아서 50척이 넘는 판옥선이 한꺼번에 통과를 못하지요!!
영화나 드라마는 수척의 판옥선이 견내량으로 들어가서 왜선을 끌어내렸다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게 아닌셈이지요!!
 
그러면 7월 7일에는 왜선들이 견내량을 통과해서 "해간도"섬 인근으로 내려와서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저의 해석이 맞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화도"인근의 해상은 지세가 협착하기에 해전을 치르지 않고 좀 더 넓은 바다인 "한산도"남단 해상까지 70여 척이나 되는 왜선을 유인해서 학익진으로 무찔렀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요? 
화도지역의 해상은 오히려 일본군에게 유리한 지형이지 않나 싶습니다. 
 
아래의 그림을 보시면  한산도 남쪽인  "용초도","비진도","연대도"가 학익진을 펼치기에 적합하다고 봅니다.

 

 
 

<전체적인 그림> 아래의 전체적인 그림을 보시면 이해를 하실 것입니다. 

 

 
[임진왜란]실제 한산 대첩은 학익진 돌격이다.

[임진왜란]실제 한산 대첩은 학익진 돌격이다.

얼마 전에 영화 한산:용의 출현을 보았습니다. 물론 드라마 징비록과 불멸의 이순신을 통해서도 한산도 해전은 학익진 전법으로 조선수군이 통쾌하게 승리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학익진

kimyun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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