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영화 한산:용의 출현을 보았습니다. 물론 드라마 징비록과 불멸의 이순신을 통해서도 한산도 해전은 학익진 전법으로 조선수군이 통쾌하게 승리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학익진 전법이란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을 착안하여 고안된 전술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왜선을 한산도 해역으로 끌어들 인후에 학익진을 펼쳐서 대포를 이용해서 무찔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다른 관점에서 한산도 대첩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대포는 해상에서 명중률이 떨어지기에 직사로 쏴야 하는데 대포를 재장전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고 배를 선회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그래서 견내량에서 왜선을 한산도 해역으로 유인을 한뒤에 학익진을 펼쳐서 그대로 돌격을 하면서 대포와 불화살을 쏴서 왜선을 격침시켰다고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한마디로 화공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사료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료는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입니다.
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火箭 )을 잇달아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 같고 우레 같아,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워 버렸다. -난중일기-
난중일기에는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여, 앞다투어 돌진을 하면서 불화살을 쐈음을 기록하였고 적의 배를 불태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난중일기에서의 한산도 해전은 일본군은 쫄았습니다. 전의를 많이 상실한 상태였고 반대로 조선수군은 무조건 이긴다는 마인드로 기세 등등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용감하게 학익진 전법으로 돌격을 했습니다.
그리고 선조실록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 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 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조실록-
선조실록에는 분명히 학익진 전법을 구사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익진 전법을 구사하여 대포만을 발사하여 왜선을 완벽하게 무찔렀다고는 기록하지 않았고 북을 치면서 학익진 전법으로 일제히 진격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산도 해전은 견내량 아래인 한산도 북쪽인 화도 인근에서 벌어진것이 아닌 한산도 남쪽 "용초도","비진도","연대도"앞 해상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세한것은 맨 아래의 다른글로 링크걸었습니다.
처음 교전에서 크고 작은 총통을 발사하여 왜선 3척을 격침시키니 이때서 왜군들의 사기가 꺾이게 됩니다. 그다음에 조선군 장수와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었고 조선군의 사기가 기세 등등하게 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의 예기( 銳氣)를 이용하여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왜선 63척을 불살랐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불살랐다는 것은 화전(화공)을 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필자는 대포는 보조수단으로 사용된 화력이고 불화살이 주력으로 사용된 화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난중일기에는 "화전"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화전"이란 말 그대로 타르나 송진, 기름등 불이 붙기 쉬운 물질을 붙여서 발사하여 불을 지르는 화살을 말합니다.
그러면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을 바탕으로 학익진을 그려보겠는데 우선 드라마&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학익진과 제가 생각하는 학익진을 그려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학익진은 아래와 같습니다.
와키자카의 기록에 의하면 "판옥선이 막 해협을 지나 넓은 곳으로 나아갔다. 한번에 키를 돌려 잡고는 큰 배를 양쪽으로 벌려 세워 아군의 배를 둘러쌌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와키자카의 기록대로 설명하면 조선수군이 먼저 학인진을 만들어서 일본군 배들을 둘러싼것입니다.
많은 학자님들도 조선수군이 배를 옆으로 돌려서 학익진을 만들어서 다가오는 일본군을 대포로 무찔렀다고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조선군의 판옥선은 앞면보다 옆면에 대포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대포도 사용했지만 불화살(화공)이 왜선을 무찌르는 주요 전과였다고 판단했기에 학익진을 만들어서 돌격해서 공격을 했다고 파악을 한 것입니다.
조선수군이 화전을 할수 밖에 없는 이유?
조선수군이 화전을 할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본 군선이 불에 타기 쉬웠고, 화살은 당시 조선군의 주력 무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화살은 대포보다는 가성비가 좋기 때문입니다.
대포는 많은 양의 화약을 소모하기에 조선 수군도 무한대로 대포를 쏠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화약은 염초를 이용해서 만들어야 하는데 염초는 당시에는 굉장히 구하기 어려운 화약재료였습니다.
따라서 일본배를 불사르는데에는 화전이 가장 탁월한 전술이었다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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